거래처 단가를 자동 계산해 주던 엑셀 매크로, 생산 일보를 집계하던 사내 프로그램. 이런 도구는 한 직원이 혼자 만들고 혼자 고치며 몇 년씩 굴러갑니다. 그 직원이 퇴사하면서 "그건 제가 만든 겁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회사는 당황합니다.
회사 노트북에서 회사 업무로 만들었으니 회사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저작권법은 만든 사람을 저작자로 보는 것이 원칙이고, 회사가 저작자가 되는 쪽이 예외입니다. 요건을 못 채운 회사가 그 프로그램을 계속 쓰면 침해가 됩니다.
법의 출발점은 회사가 아니라 만든 사람입니다
저작권법 제2조 제2호는 저작자를 "저작물을 창작한 자"로 정합니다. 급여를 줬다거나 회사 장비를 썼다는 사실만으로 저작권이 회사로 넘어오지는 않습니다. 파일의 소유권과 저작권은 다른 권리입니다.
회사가 저작자가 되는 통로는 제9조의 업무상저작물 하나뿐입니다. 대법원도 2021다236111 판결에서 이 규정이 실제 창작자를 저작자로 보는 원칙의 예외라고 못 박았습니다.
업무상저작물이 되려면 세 가지가 동시에 맞아야 합니다
제2조 제31호와 제9조를 합치면 회사가 저작자가 되는 조건은 셋입니다.
- 법인·단체 등 사용자의 기획 아래 작성됐을 것
- 그 법인의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이 업무상 작성했을 것
- 계약이나 근무규칙 등에 다른 정함이 없을 것
하나만 빠져도 저작자는 그 직원입니다. 근로계약서나 사규에 산출물 권리를 직원에게 남기는 문구가 있으면, 그 문구가 법 규정보다 앞섭니다.
엑셀 매크로와 사내 프로그램은 공표하지 않아도 회사 것이 됩니다
일반 저작물은 법인 명의로 공표되는 것까지 요구합니다. 사보 기사나 홈페이지 문구처럼 회사 이름을 걸고 외부에 내놓은 것이어야 합니다.
제9조 단서는 컴퓨터프로그램저작물에 이 공표 요건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사내에서만 돌리던 VBA 매크로나 재고 관리 프로그램은 외부에 공개된 적이 없어도 업무상저작물이 될 수 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 저작권 안내도 같은 내용으로 설명합니다.
프로그램은 공표 요건만 면제됩니다. 기획 요건과 계약·근무규칙 요건은 그대로 남고, 회사가 법정에서 실제로 다투게 되는 지점은 거의 항상 기획입니다.
기획을 증명하지 못한 회사는 3,960만 원을 물었습니다
대법원 2021다236111 판결(2021년 9월 9일 선고)은 회사에서 프로그램 개발 업무에 종사했던 개발자가 회사를 상대로 침해금지와 손해배상을 청구해 대법원까지 이긴 사건입니다. 대법원은 기획을 "법인 등이 일정한 의도에 따라 저작물 작성을 구상하고 그 구체적 제작을 업무 종사자에게 지시하는 것"으로 정의했습니다.
묵시적 기획도 인정되지만, 회사 의사가 명시적으로 드러난 경우와 동일시할 만한 사정이 있어야 합니다. 이 회사는 그 증거를 대지 못했습니다. 원심은 제125조 제2항의 통상 사용료를 기준으로 손해액 39,600,000원을 인정했습니다.
입사 전에 만들어 온 프로그램은 입사와 함께 넘어오지 않습니다
광주지방법원 2023노3109 사건을 보면 선이 더 분명해집니다. 한 개발자가 2013년경 회사 의뢰로 태양광 발전소 모니터링 프로그램을 만들어 납품하고, 2018년 2월 그 회사에 입사해 급여를 받으며 같은 프로그램을 개량했습니다. 2020년 퇴사 후 회사가 이를 회사 명의로 저작권 등록했고, 허위 등록으로 기소됐지만 1심과 항소심 모두 무죄였습니다.
항소심(2024년 10월 30일 선고, 리걸타임즈 보도 기준)은 입사 전 원본은 개발자 것이지만 입사 후 급여와 회사 자원을 들여 개량한 결과물은 업무상저작물이라고 봤습니다. 같은 프로그램이라도 입사 전 버전과 입사 후 버전을 따로 따진다는 뜻입니다.
회사가 소송을 걸어도 파일을 못 내놓으면 집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2022가합547189 판결(2024년 6월 14일 선고)은 반대 방향입니다. 교육 플랫폼 회사가 9개월 근무하고 퇴사한 개발자를 상대로 소스코드 10개의 저작권·영업비밀 침해를 주장하며 5,000만 원을 청구했지만 전부 기각됐습니다.
10개 중 9개는 내용을 확인할 증거조차 제출되지 않았고, 확인된 1개는 제3자가 공개한 강의자료를 그대로 복제해 창작성이 없었습니다. 퇴사자 PC를 초기화해 버리면 회사는 권리를 주장할 재료부터 잃습니다.
근로계약서와 취업규칙에는 이런 문구가 들어가야 합니다
제9조가 "계약 또는 근무규칙 등에 다른 정함이 없는 때"라고 적어 둔 덕에, 거꾸로 계약으로 정해 두면 그것이 먼저 적용됩니다. 회사에 유리하게 정하는 것도 허용되니 세 줄을 넣으세요.
첫째, 재직 중 업무와 관련해 작성한 프로그램·매크로·문서의 저작재산권은 작성 시점에 회사에 귀속한다. 둘째, 회사는 이를 수정·개량하거나 제3자에게 양도할 수 있고 직원은 저작인격권을 행사하지 않는다. 셋째, 입사 전에 만든 프로그램을 업무에 쓰려면 입사 시 목록으로 신고하고 회사의 무상·영구 사용을 허락한다.
셋째 항목을 넣어 두면 광주지법 사건 같은 다툼이 애초에 생기지 않습니다. 취업규칙에만 쓰고 근로계약서에서 빠뜨리면 개별 동의 여부로 다시 다투게 되니 양쪽에 모두 넣으세요.
퇴사 인수 때는 이 목록으로 받아 두세요
인수인계는 설명을 듣는 자리가 아니라 파일을 넘겨받는 자리입니다. 최소한 여섯 가지를 확인하세요.
- 엑셀 파일 원본과 VBA 매크로 코드, 모듈에 걸린 암호
- 프로그램 소스코드 전체와 빌드에 필요한 설정 파일
- 외부 서비스 접속 정보, 데이터베이스 계정, 라이선스 키
- 실행 파일만 있고 소스가 없는 도구의 목록
- 작성 시점과 작성자를 확인할 업무 지시 메일, 회의록, 커밋 이력
- 입사 전 저작물 신고 목록의 최종본
다섯째 항목이 소송에서 기획 요건을 증명하는 거의 유일한 재료입니다. "이 집계 매크로를 만들어 주세요"라고 지시한 메일 한 통이 3,960만 원을 가릅니다.
계약 조항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외주 개발자와 프리랜서에게는 업무상저작물 규정이 통하지 않습니다. 제9조는 업무에 종사하는 자를 전제로 하므로, 도급·위탁에서는 계약서에 저작재산권 양도를 명시하지 않으면 대금을 다 치렀어도 권리가 개발자에게 남습니다.
저작인격권은 양도 대상이 아니어서 성명표시권과 동일성유지권은 창작자에게 그대로 남습니다. 회사가 할 수 있는 일은 불행사 합의를 받아 두는 것까지입니다. 분쟁이 생긴 뒤에 조항을 고쳐도 소급되지 않으니, 그때는 사용 허락을 돈으로 사는 쪽이 소송보다 쌉니다.
사내 도구의 인수 기준은 실무 가이드와 운영 노트에 이어서 정리해 두었습니다. 조문 해설은 문화체육관광부 저작권 안내에서 보시고, 외주 개발의 귀속 설계는 Codeforest로 문의하세요.
결론: 조항 한 줄과 지시 메일 한 통으로 가르세요
퇴사한 직원이 만든 프로그램을 계속 쓸 수 있는지는 두 가지 서류로 갈립니다. 근로계약서·취업규칙의 귀속 조항과, 회사가 그 프로그램을 구상하고 지시했다는 기록입니다. 둘 다 없으면 2021다236111처럼 통상 사용료를 물게 됩니다.
반대로 회사가 권리자라도 파일과 근거를 남기지 못하면 2022가합547189처럼 청구가 전부 기각됩니다. 근로계약서에 귀속 조항과 입사 전 저작물 신고란을 넣고, 사내 도구별로 누가 언제 어떤 지시로 만들었는지 한 장짜리 목록을 만들어 두세요.